융복합센터 MOOC 강좌: 융복합 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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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복합 약사(融複合 略史)

제1장 서언

 

바야흐로 4차 산업혁명 시대가 도래하였다고 한다. 4차 산업혁명에 대한 개념은 아직 완벽하게 정립되지는 않았지만 인류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어놓게 될 기술 혁명이 모든 분야에서 이루어져서 인류가 이제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문명의 발전을 누리게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인류의 문명은 고대 메소포타미아, 나일 강, 인더스 강, 황하(黃河)라고 하는 오리엔탈의 4대 문명의 발원지(發源地)로부터 시작되어 세계 각 지역에서 수없이 다양한 형태로 끊임없이 발전하여 왔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과거 수천 년의 기간 동안에 이룰 수 없었던 놀라운 문명의 발전을 단기간에 달성하였는데, 그것은 근세 서구 유럽에서 시작된 산업혁명 이후 기술혁신이 급속도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산업혁명은 1차로 18세기 후반에 증기(蒸氣) 동력의 발명과 기계화(機械化), 2차로 19세기 후반에 전기의 발명과 대량생산, 3차로 20세기 후반에 컴퓨터의 발명으로 정보화(情報化) 시대가 개막되고 나서, 21세기에 들어와서 마침내 4차 산업혁명의 시대로 접어들게 된 것이다. 인간의 삶의 질을 근본적으로 바꾸게 될 4차 산업혁명은 인공지능(AI)의 발전과, 기술과 학문 간의 융복합(融複合)이 핵심이다.

융복합은 서로 다른 것을 단순하게 합치거나 또는 합쳐서 새로운 것으로 변형시키는 것이라기보다는 둘 이상의 분야에서 서로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요인들을 찾아내어 아울러 작용시킴으로써 상승효과(Synergy effect)를 얻고자하는 개념이다. 즉 기술과 학문의 많은 분야에서 서로를 연결할 수 있는 요소들을 찾아내어 상승효과를 극대화하고자 하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융복합의 개념이 초현대(超現代)인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들어와서 비로소 생겨난 것은 아니다. 기록이 존재하는 수천 년의 지나온 역사를 살펴보면 융복합의 개념은 항상 존재하고 있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각 시대마다 역사를 이끌어간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정치, 경제, 외교, 군사, 문화, 예술, 기술, 제도 등 인류가 당면한 많은 문제들을 해결함에 있어서 융복합적 사고를 통하여 자신들이 가진 여러 분야의 다양한 지식을 사용함으로써 보다 효율적으로 해결해왔다. 그들을 융복합형 인간(Homo Integretus)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다양한 사물을 통합하고 수렴(收斂)하여 새로운 것을 창출하는 인간이라는 의미이다. 그들은 단순한 관점이나 편협된 사고에서 벗어나 기술과 학문을 통합하는 융복합적 사고를 가지고 창의적인 활동을 함으로써 당시대 사람들에게 유익을 끼칠 뿐 아니라 나아가서 인류 역사와 문명 발전에 공헌하였다고 할 수 있다.

 

긴 역사를 거쳐 살아온 평범한 대중들 역시 중요한 사람들이지만, 인류 문화와 문명 발전에 원동력을 제공한 사람들은 많은 분야의 리더(Leader)들이었다. 인류의 역사는 이러한 리더들의 역사로 기록되어 왔으며, 곧 창의적이고 융복합적 생각을 가진 인물들이 역사를 이끌어 진행시켜 왔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한 사회와 국가가 발전하려면 이러한 융복합형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어야 한다. 본고에서는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세계역사 속에서 활동했던 뛰어난 융복합형 인물들을 대표적으로 추려서 개괄해 보기로 한다. 수없이 많은 역사 속 인물들 중에서 특별히 융복합적 사고를 통하여 창의성을 발휘함으로써 시대를 이끌어간 왕(王)이나 장수(將帥), 정치가, 사상가, 과학자, 예술가 중심으로 살펴볼 것이다.

제2장 고대 동서양 융복합 인재

호메로스(BC. 8~9세기)

고대 그리스의 위대한 서사시인(敍事詩人) 호메로스(BC. 8~9세기)는 성경을 제외하고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가장 오래된 문헌인 󰡔일리야드󰡕와 󰡔오디세이아󰡕의 저자로서 일설에 의하면 시각장애인이었다고 한다. 두 개에 불과한 그의 문학작품이 지닌 감동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줄어들지 않는다. 그토록 오래 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짜임새 있는 구조와 풍부한 내용은 이후의 어떤 문학작품보다도 뛰어나서 그 영향력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해 계속되어왔다. 호메로스가 그토록 놀라운 작품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단순히 상상력이 풍부한 문학가였기 때문이 아니다. 그는 시인으로서 필요한 소양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고, 천문(天文), 지리(地理), 정치, 군사 등에 이르기까지 폭넓고도 깊은 지식이 있었으며, 무엇보다 당시까지 구전으로 전해지던 고대 그리스 신화(神話)와 역사를 잘 알고 있었다. 방대한 지식을 활용하고 신화(神話)와 역사를 접목하여 위대한 문학작품을 만들어낸 것은 그가 융복합형 인물이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평상시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고 놓치고 있는 것들을 자신의 융복합적인 관점에서 이해하고 체계화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그는 역사와 역사 속 인물들에 대해 단순한 관점으로 보지 않고 융복합적인 사고를 통하여 이해함으로써 위대한 작품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그의 위대한 작품은 후대 수많은 문학작품에 영향을 끼쳤을 뿐 아니라 그의 사후 얼마 지나지 않아 BC. 6세기경에 태동한 그리스의 철학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쳤고, 역사가들이나 예술가들에게도 많은 영감을 주면서 서양의 양대 정신적 기둥의 하나인 헬레니즘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왔다.

플라톤(BC. 427~347)

서양의 고대 철학자들 중에서 융복합형 인물로 대표되는 사람은 플라톤과 그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이다. 플라톤(BC. 427~347)은 소크라테스(BC. 469~399)의 제자로서 철학자이자 수학자였다. 그의 명언 중에는 수학은 만물의 근원이며 수학을 이해해야만 참된 지식을 쌓고 세상의 이치를 이해할 수 있다고 했을 정도였다. 또한 건강한 신체를 길러야 한다는 체육(體育)사상을 주장하고 귀족 정치를 옹호한 정치적 신념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소크라테스가 죽은 후에 서양 최초의 사설 교육기관인 아카데미아를 세우고 제자들을 모집하여 철학을 가르치고 저작활동을 하였다. 그의 철학은 소피스트들의 상대주의를 논박하기 위하여 이데아설을 제창하였기 때문에 관념론(觀念論)의 철학이라고 한다. 이데아는 비물질적이며 영원과 초세계적인 절대적 실재이며, 이에 대하여 물질은 감각적 존재로서 잠정적이며 상대적이라고 했다. 따라서 본질은 이데아이며 감각에 호소하는 경험적인 사물의 세계는 이데아의 그림자인 모상(模相)이라는 이원론적 세계관을 내세웠다.

 

그러나 플라톤 사상의 핵심은 국가를 효과적으로 운영하여 백성을 잘 살게 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따라서 그는 정치철학의 시조라고 할 수 있다. 철학과 정치에 관한 많은 작품(30권 이상)을 남겼는데 󰡔국가론󰡕에서 민주주의가 잘못하면 중우정치(衆愚政治)로 변질될 우려가 있기 때문에 반대하고 귀족 정치를 옹호했다. 국가를 하나의 커다란 개인으로 보고 지혜와 용기가 있는 통치 계급인 철인(哲人)들이 정치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고대 그리스의 많은 철학자들 중에서 특별히 융복합형 인물로 대표되는 것은 그의 사상이 소크라테스에게만 영향받은 것이 아니라, 자연철학, 엘레아학파, 피타고라스, 헤라클레이토스, 소피스트 그리고 현실 정치와 체육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요소들을 융복합적으로 수렴(收斂)하여 조화를 만들어냄으로써 기존의 그리스 전통을 뛰어 넘는 면모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플라톤의 철학은 후대 철학뿐만 아니라 중세 기독교의 스콜라 철학과 근현대 사상체계에 이르기까지 막대한 영향력을 끼쳤다.

아리스토텔레스(BC. 384~322)

다음으로 아리스토텔레스(BC. 384~322)는 철학자이자 수학자, 과학자로서 플라톤의 제자이자,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스승이기도 하다. 그는 형이상학, 정치학, 윤리학, 논리학, 의학, 물리학, 시와 연극, 음악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분야에 걸쳐 47권의 방대한 저서를 남긴 학자였고 역사상 가장 뛰어난 융복합형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사물을 올바로 이해하려면 단편적인 지식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일찍이 인식하였고, 따라서 아테네를 비롯한 고대의 수많은 지식을 섭렵하고 다양성을 융복합적으로 수렴하여 체계적으로 종합한 백과사전적 학자의 효시였다. 그는 존재하는 모든 지식을 집대성하려는 의욕 아래 학문 전반의 체계화를 시도하여 후대 서양학문의 기초를 제공하였으며 ‘경험을 통한 일반화’라는 과학과 학문의 방법론 자체를 처음으로 정립한 사람이다.

 

플라톤 사후, 그는 필립포스 2세의 부름으로 마케도니아의 왕립 아카데미에서 알렉산드로스의 태자태부(太子太傅)가 되어 3년간 가르쳤다. 그 후 다시 아테네로 돌아와서 리케이온 지역에서 소크라테스가 사색하며 산책했다고 전해지는 어느 숲속에 자신의 학교를 세우고 후학들을 양성했는데 페리파토스 학파(peripatetics) 곧 소요학파(逍遙學派)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또한 그는 최초의 거대한 도서관을 세웠다고 전해진다. 그곳에는 수백 권의 수고(手稿)들과 지도들, 동식물 표본들이 소장되어 있었고, 그는 그것들을 강론 도중에 예증(例證)하는 것으로 적절하게 사용하였다. 그는 자신의 학교에서 제자들과 공동 식사를 하고 함께 지내며 교육과 강론을 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모든 지식을 체계화하기 위하여 크게 3분류하였다. 존재와 구성, 원인과 기원을 대상으로 하는 이론학(理論學)에 철학(형이상학)과 수학, 자연학을 포함시키고, 인간의 활동을 대상으로 하는 실천학(實踐學)에 윤리학, 경제학, 정치학 등을 포함시키며, 창조성을 대상으로 하는 제작학(製作學)에 수사학(修辭學), 시(詩), 음악 등의 예술 활동을 포함시켰다.

 

한편, 그의 논리학은 사후에 ‘기관’, ‘도구’라는 뜻의 󰡔오르가논󰡕이라는 이름으로 집대성되었는데, 논리학을 모든 학문을 위한 도구인 예비학(豫備學)으로서 올바른 추론의 원리를 다루는 학문이라고 보았다. 그는 인간의 지식 전체를 망라하고 그것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고 하였는데, 학문의 체계는 후대에 점차 더 많은 여러 과목으로 분지(分枝)되지만 총체적으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3분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오늘날까지도 사용하는 교육의 과목들이나 전문 영역의 명칭 가운데 많은 이름이 그의 분류에서 시작된 것이다. 이 점에서 그는 서양의 지식의 역사에서 총체적인 혹은 백과사전적인 지식의 원조로 볼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자연학(Physics)에 대조되는 개념에서 메타피직스(Metaphysics) 곧 형이상학(形而上學)이라고 하는데, 경험과 관찰과 감각을 중요하게 여긴 그는 플라톤의 관념론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였지만 비물체(非物體)적인 이데아의 견해를 비판하고 진정한 개체는 질료와 형상의 결합으로 이루어진다고 하며 내재적인 형상을 주장했다.

또한 플라톤이 이상주의적 도덕을 추구한데 비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자기의 본성인 이성을 잘 계발해 나간다면 최선의 상태에 이른다는 현실주의적 윤리관을 피력했다. 신을 보는 관점에서 플라톤은 초월적인 유신론(有神論)인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내재적 범신론(汎神論)으로 신은 현실계 안에 존재하면서도 동시에 세계를 초월하며 자족하는 존재로 보았다. 따라서 둘의 관계를 보면, 플라톤이 초감각적인 이데아의 세계를 존중한 것에 비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에게 가까운 감각되는 자연물을 존중하고 이를 지배하는 원인들의 인식을 구하는 현실주의 입장을 취한다고 하겠다.

아무튼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전의 학설들을 모두 집대성해서 새롭게 체계를 세웠다. 특히 자연에 대한 그의 해박한 지식은 후세 사람들에게까지 많은 도움을 주었으며, 기독교 신학에 기반을 둔 중세의 스콜라 철학에서도 실재론(實在論)과 반대되는 입장인 유명론(唯名論)은 그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

 

알렉산드로스(BC. 356~323)

 

알렉산드로스(BC. 356~323)는 헬라 반도로부터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에 걸친 광대한 대륙을 정복하여 대제국을 건설하고 그리스 문화와 오리엔트를 융합하여 헬레니즘 문화를 형성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정복자로서 영어명으로 알렉산더 대왕(Alexander the Great)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는 도시 국가였던 그리스를 통일한 필리포스 2세의 아들로서 소년기에 이미 세계를 하나의 제국으로 통일하는 원대한 꿈을 꾸었디. 20세에 왕위에 올라 이후 13년 만에 세계를 정복하였기 때문에 그에 대한 일반적 인식은 고대 전쟁 영웅의 모습으로 고정되어 있지만 사실은 학문에 조예가 깊은 매우 지적인 사람이었으며 풍부한 감성의 소유자로서 미술과 문예에도 상당한 식견을 가졌다고 알려졌다.

 

그는 13세 나이가 되었을 때 마케도니아 궁중에 설립된 왕립 아카데미에서 당시의 대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를 스승으로 두고 3년 동안 윤리학, 정치학, 철학, 논리학, 문학, 의학, 자연과학, 의학과 예술에 이르기까지 각종 학문을 배웠다. 그 결과 그는 뛰어난 융복합형 인물로 성장할 수 있었는데, 단순한 정복자가 아니라 학문적, 예술적, 정치적 모든 면에서 사물과 정세(情勢)를 융복합적 사고를 통해 이해하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석을 붙여준 호메로스의 시를 애독하여 원정(遠征) 때도 그 책을 지니고 다니며 전쟁 영웅의 의지를 불태웠다고 한다. 원정(遠征)에는 학자들을 대동하여 각지의 탐험과 측량 등을 시키고 그리스 문화를 전하려고 노력하였다. 또한 군사(軍事)와 행정에서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었고, 전쟁에 직접 참여하여 부하들보다 앞장서는 용감성을 나타냈으며, 원래 술을 좋아하였지만 모든 향락을 끊고 철저히 절제된 삶을 통해 자신을 훈련함으로써 세계를 제패하는 위업을 달성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플라톤이 말한바 지혜와 용기, 절제를 모범적으로 보여준 인물이라고 하겠다.

그의 정복 과정은 페르시아 원정을 위해 소아시아(지금의 터키지역)로 지나가면서 이루어졌다. 당시 그 땅을 지배하던 페르시아 군대와 싸워 승리하고 페르시아의 지배하에 있던 그리스의 여러 도시를 해방하였다. 이어서 지금의 터키 지역의 땅을 모두 점령한 후에 북(北)시리아와 페니키아까지 공략한 후에 이집트로 진격하였다. 이집트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 나일강 하구에 자신의 이름을 딴 알렉산드리아 도시를 건설하여 속국으로 삼았다. 계속하여 바빌론, 페르세폴리스, 엑바타나 등의 여러 도시를 장악하는 데 성공하고 나서, 마침내 더욱 동쪽으로 원정하여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이란 고원을 정복하였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세계를 하나의 제국으로 만들고자 하는 꿈을 달성하기 위하여 인도까지 원정하였는데, 인더스강(江)에 이르렀을 때 군사들 중에 열병이 퍼지고 장마가 계속되었다. 어쩔 수 없이 군대를 돌려 BC 324년에 페르세폴리스에 되돌아왔다가 다음 해에 바빌론에서 아라비아 원정을 준비하던 중 33세의 젊은 나이로 열병에 걸려 갑자기 죽었다.

 

그의 동방 원정은 세계 역사상 육로를 통한 최초의 탐험적 정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하고 자기가 정복한 땅에 알렉산드리아라고 이름 지은 도시를 70개나 건설하였다고 한다. 이 도시들은 헬라문화가 동방으로 진출하여 오리엔트 문명과 만나게 되는 근거지들이 되면서 헬레니즘 형성에 큰 구실을 하였다. 도시들을 이어준 도로망을 확충하고 화폐들을 보급하여 문화, 교통, 상업 분야에서 놀라운 교류와 큰 발전을 이루었다. 그는 원정 지역에서 획득한 이국(異國)의 서적들을 보호하고 학자들을 대우하여 어울리며 문예에 대한 선진적인 인식으로 여타의 정복자들과는 다른 면모를 보여주었다. 또한 스승의 연구를 위해 자신의 원정길에서 각 지역의 식물과 동물의 표본들을 수집했으며, 아리스토텔레스가 최초의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드는데 도움을 주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리케이온 학당의 설립과 운영에도 상당한 기금을 후원했으며 원정길에서 획득한 상당수의 동방의 뛰어난 서적들을 스승에게 보냈다고 한다. BC 5-4세기경 이미 그리스 문화의 황금기를 구가했던 아테네의 철학과 예술이 있었는데, 알렉산드로스 시대에 더욱 꽃피워 절정기를 맞이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인문학’(Liberal Arts)이라고 부르는 것은 당시 그리스의 도시 국가들의 ‘자유 시민’(Liberal Citizens)으로서 갖춰야 할 기본적인 소양 교육인 ‘아테네식 교양’을 그 기원으로 하여 이후 서구 엘리트들의 기본 소양으로 차차 자리매김 되었다. 아무튼 그는 모든 나라를 하나로 묶어 문화적으로 통일된 대제국을 세우려고 하였는데, 아놀드 토인비가 말한 바처럼 그가 일찍 죽지 않고 30년 이상 더 생존 했다면 세계의 문화와 역사는 더욱 빠르게 발전했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이 과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죽은 뒤 헬라의 대제국 영토는 마케도니아, 소아시아, 시리아, 이집트의 네 나라로 갈라졌으나, 각각의 지역에서 헬레니즘 문화를 발전시키며 BC 31년에 로마에 의해 멸망당하기 전까지 수백 년간 헬라 시대를 이어갔다.

카이사르(BC. 100~44)

고대 동서양에는 앞에서 언급한 인물들 외에도 융복합적 사고를 가지고 당대를 리드하던 인물들이 수없이 많았다. 일일이 다 언급할 수는 없으므로 그중에서 특별히 유명한 한 두 사람들을 살펴보면, 먼저 서양에서 처음으로 황제라는 칭호를 쓰기 시작하게 만든 카이사르(BC. 100~44)는 로마가 알렉산더 시대보다 더 넓은 대제국을 건설하는데 기초를 제공한 사람이다. 그는 장군이자 행정가이며 문학가로서 문무를 겸비한 융복합형 인물이었다.

 

그는 여러 관직을 역임하면서 뛰어난 웅변술과 민심을 파악하는 능력으로 민중의 지지를 쉽게 얻어낼 수 있었고, 군사(軍事)에 있어서 탁월한 재능을 발휘할 뿐 아니라 정치와 경제의 운영면에서도 성과를 거둠으로써 명성을 누리며 대정치가가 될 수 있었다. 일개 도시국가에 불과했던 로마가 세계 제국이 되려면 절대 권력을 가진 강력한 힘에 의하여서만 가능하기 때문에 군사독재의 필연성을 주장하여 결국 로마 제정(帝政)을 수립케 한 것이다. 그는 사회개혁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라틴 문학의 걸작이라고 평가되는 󰡔갈리아 전기(戰記)󰡕, 󰡔내란기󰡕 등의 작품을 통해 문학가로서도 뛰어난 역량을 보였다.

중국 춘추전국시대

BC 6-4세기경 서양에서 철학과 각종 학문들이 태동하여 발전하고 그리스 문화가 만개하고 있을 때 황하(黃河) 문명의 중심지인 중국에도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를 거치면서 제자백가(諸子百家)들의 활약을 통해 동양의 정신문화가 꽃피우고 있었다.

 

공자•증자•맹자 등의 유가(儒家)와 노자•장자의 도가(道家), 상앙•한비자 등의 법가(法家), 묵자의 묵가(墨家), 손자의 병가(兵家), 기타 종횡가(縱橫家), 농가(農家), 잡가(雜家) 등등. 이들은 혼란한 시대를 살아가면서 세상과 인간 존재를 깊이 사색하며 당면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던 동양의 융복합형 사상가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이 발흥한 이유는 BC. 770년경 주(周)나라가 견융(犬戎)족의 침입으로 수도를 동쪽의 낙양(洛陽)으로 옮기면서 가족중심의 혈연적 봉건제가 붕괴되면서 제후국들 간에 패권을 다투는 혼란한 양육강식의 시대로 돌입하여 사회질서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더 많은 백성과 경지를 확보하려는 치열한 경쟁으로 말미암아 끊임없는 전쟁 속에 백성은 도탄에 빠져있었다.

중국역사상 춘추전국시대는 인륜이 무너져가는 윤리적•정치적 혼란기이면서 한편으로는 철기와 우경(牛耕), 관개 시설의 보급으로 생산력의 증대와 함께 문화면에서도 비약적인 발전이 이루어졌다. 수많은 전쟁을 치르면서 무기개발과 함께 기술의 발전이 이루어지고 제후국들 간에 국가차원의 생산력을 높이려는 많은 정책들이 강구되기도 했다.

 

이러한 사회의 발전과 혼란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며 어지러운 세상을 어떻게 구제할 것인가에 대한 각종 사상이 태어났던 것이다. 제자백가들의 활동은 단지 사회•정치사상만이 아니라 지리나 농업, 문학 등의 학술 활동 전반에 영향을 끼쳤다. 이들 중에서 특별히 융복합적 사고를 가지고 당시 사상들을 깊이 연구하여 자신의 독특한 사상체계로 수렴하여 체계화한 맹자(孟子)와 한비자(韓非子)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맹자(BC. 372~289)

 

맹자(BC. 372~289)는 공자-증자-자사로 이어져 온 학통을 계승하여 유가(儒家)의 체계를 세운 인물로 공자와 비교하여 아성(亞聖)으로 불린다. 그는 공자가 죽고 나서 100년 정도 뒤인 전국시대(戰國時代)에 활약하였는데, 공자가 활약한 춘추시대(春秋時代)만 하더라도 제후국들이 실제적으로 독립한 나라였을지라도 주(周) 왕실에 대해서만큼은 근왕(勤王)의 기치를 내걸고 존중하였다.

그러나 전국시대에 들어서면 주나라는 거의 존재감을 상실하였고, 살아남은 7개 나라들이 천하를 제패한다는 목표를 두고 약육강식의 전쟁을 전개하였다. 맹자는 도덕과 사회질서가 파괴되어 극도로 혼란한 패륜의 시대를 살면서 유가(儒家)의 가르침을 통해 인륜과 도덕질서의 회복을 외치는 동시에, 정치이상으로는 왕도정치(王道政治)를 내세우면서 교육과 보민양생(保民養生)으로써 부국(富國)을 이룰 수 있다면서 농업과 기술을 장려하는 민본주의 사상을 펼쳐보였다. 20년 이상을 제후국들을 다니면서 인의(仁義)의 덕을 바탕으로 하는 왕도정치를 시행하라고 설파하였지만, 당시의 제후들이 필요로 했던 것은 부국강병의 정치술과 전략이었으므로 맹자에게 공감을 하면서도 그의 사상을 채용해주는 나라가 없어서 당대에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사실 맹자는 중용을 지은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子)의 직계 제자가 아니었으므로 유가의 학통을 잇는 직접적인 계승자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공자와 그의 제자들의 사상을 독자적으로 연구하여 체계화하는 한편 다른 학파들을 비판하고 때로는 그들과 논쟁하면서 유학의 골격을 완성하여 후대에 전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맹자를 융복합형 인물이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시대의 문제들을 단편적으로 보지 않고 융복합적 사고를 가지고 종합적인 분석을 통하여 다방면의 해결책을 제시하였다. 전쟁이 끊이지 않던 전국시대에 제후들의 패도(霸道)적 부국강병을 반대하고 도덕적으로 정치하면 오히려 부국강병을 이룰 수 있다는 왕도정치의 효용을 설파하였다. 덕치주의의 유가적 사상이 철학이나 학문으로서만이 아니라 실제 정치에 활용되어야 한다는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맹자의 주장은 대부분이 당시의 실권자들을 상대로 한 것이었다. 현실적으로 부국강병에 광분하고 있던 여러 군주들에게 눈앞의 이(利)를 버리고 인의(仁義)를 찾으라고 했는데, 비록 현실 정치에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지만 후대 중국과 동양의 많은 나라들이 정치와 도덕이념으로 채용하여 천 수백 년간 이상 그 영향력을 끼쳐왔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는 “백성이 가장 귀하고, 사직이 다음이고, 임금은 가볍다”라고 하여 민본사상(民本思想)을 최대한으로 고취했다. 군주가 백성을 사랑하고 민생을 안정시켜 민심을 얻으면 온 천하가 저절로 귀순심복(歸順心腹)할 것이며, 그때는 천하를 덕으로 다스리는 아름다운 세상이 오게 되고 그것이 바르고 영원한 길이라고 믿었다. 그의 민생주의(民生主義)는 경제사상의 일환이기도 했다. 그는 농업생산을 진작시키고 경제를 발전시켜 국민복리를 증진시켜야 한다는 주장도 하였다. 즉 경제안정과 민생안정이 정치의 바탕이라고 보았다. 그는 만일 군주가 백성을 억압하고 폭군의 위험이 있을 때는 심지어 역성혁명의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 당시로서는 매우 과격한 주장까지 함으로써 고대에 벌써 현대의 민주주의의 선구적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한비자(BC 280∼233)

 

한비자(BC 280∼233)는 전국시대 말기 한(韓)나라 출신으로 처음에 순자(荀子)에게 배웠으나 유가의 학통을 잇지 않고 법가(法家) 사상을 집대성하여 체계화하고 완성시킨 사람으로 최초로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이 가장 만나보고 싶어한 인물이었다.

진시황이 그의 계책들을 채택하여 실천함으로써 결국 천하를 통일할 수 있었으므로 그의 사상은 진(秦) 이후에도 후대에 중국의 여러 통일제국 성립을 뒷받침한 중요한 사상이 되었다. 법가의 계보는 춘추시대인 BC. 536년경 중국 최초의 성문법인 형정(刑鼎)을 주조한 정(鄭)나라의 재상 자산(子産)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 후 전국시대 초기 위(魏)나라의 재상을 지낸 이극(李克)은 『법경(法經)』을 저술하여 실질적인 법가의 시초로 보고 있다. 전국시대 중기 진(秦)나라의 재상이었던 상앙(商鞅)은 법치주의를 확립시킨 인물이며, 조(趙)나라의 신도(愼到)와 한(韓)나라의 신불해(申不害) 등의 사상으로 이어져 오다가 전국시대 말기 한(韓)나라의 한비자(韓非子)에 의해 법가 사상이 집대성된다.

 

한비자가 등장하기 전에 법가는 현실 정치 무대에서 활용되는 정치술(政治術)의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한비자는 법가를 군주가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하나의 사상 체계로 만듦으로써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동양의 마키아벨리라고 불리는 한비자는 55편에 이르는 대작인 󰡔한비자(韓非子)󰡕라는 그의 저서에서 제왕학, 부국강병론, 체제개혁론, 인간과 권력의 본성에 대하여 자신의 철학과 사상을 피력하고 있다. 그는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군신관계가 매매관계라고 하였다. 그는 군주의 이익이 국가의 이익이라고 하였고, 신하에 대한 통제 또한 군주의 이익과 국가의 이익이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기 위해서 절대적 권력을 가진 군주는 공평무사한 법을 집행하여야 하며, 효율적인 정치술로 신하를 통제해야 한다는 법가정치를 주창하였다. 그뿐 아니라 국가부강을 위해서 농업생산력을 높이는 여러 가지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도 춘추전국시대의 극심한 사회 혼란 속에서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 그는 다른 법가 사상가들과 마찬가지로 전쟁과 형벌을 통해 해결하는 방법이 유일한 길로 여겼다. 전쟁을 통해 천하통일을 하면 전쟁이 없어질 것이고, 형벌을 통해 사회적 죄악이 없어지면 마침내 형벌도 없어진다는 것이 생각이었다. 심지어 실용성이 없는 일체의 학문사상을 금지시켜야한다는 주장도 하였다. 진시황은 한비자와 같이 순자(苟子)에게 동문수학한 이사(李斯)를 재상으로 삼아 강력한 법가 정책을 시행하여 마침내 통일을 이룰 수 있었다. 아무튼 한비자의 사상은 후대 중국이 절대 권력을 가진 황제에 의한 전제제도를 확립하고 중앙 집권에 큰 공헌을 하여 중국을 제국으로 만드는 데 기여한 것이 분명하다.

 

진시황(BC. 259~210)

 

진시황(BC. 259~210)은 진(秦)나라의 36대 군주로 장양왕의 아들이며 본명은 정(政)이다. 그는 중국사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로서 오늘날의 중국의 영문명인 차이나(China)라는 말이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인 진(秦)을 음역한 것이라는 사실로 볼 때 그의 위대성을 알 수 있다. 이전까지 많은 제후국들로 분열되어 오던 중국대륙의 모든 나라를 통일하여 하나의 거대한 제국으로 만들고 문자와 화폐와 제도를 통일하여 이후부터 오늘날까지의 중국 자체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다.

 

만일 그가 중국을 하나의 거대한 제국으로 통일하지 않았다면, 중국은 유럽처럼 여러 나라로 나뉜 채 현재에 이르렀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중국역사는 물론이고 세계사도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그는 BC. 247년에 부왕이 서거한 후 열세 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여 초기에는 승상 여불위(呂不韋)의 보필을 받았으나 장성하면서부터 점차 강력한 통치력을 발휘했다. 중국 역사상 가장 의욕적이고 명민하며 위대한 군주로 평가되는 그를 융복합형 인물로 보는 것은 별로 어려움이 없다. 그의 통치는 이웃 나라들과의 전쟁을 위해 군사력을 키우고 경제력을 키워 부국강병을 이루는데 그치지 않고 내치와 외치에 균형을 두고 적절히 이루어 간 것을 알 수 있다. 인재 등용에서부터 국내외의 유능한 인물들을 발굴하여 차별 없이 적재적소에 잘 활용하였고, 특히 한비자와 이사의 법가(法家) 사상을 잘 활용하여 통일 이전에 변방에 있던 작은 나라에 불과했던 진나라를 당시 최강국으로 키우는데 성공하였다.

BC. 230년에 한(韓)나라를 시작으로 나머지 6개 나라를 차례로 멸망시켜 마침내 BC. 221년에 천하를 통일할 때까지 약 10년이 걸렸는데, 전국시대 이들 나라가 수백 년 동안 할거해 왔음을 생각하면 믿기 힘든 일이다. 진나라는 중국대륙의 서쪽 외곽에 떨어져서 험준한 지형에 의존해 외침을 잘 받지 않고 오랫동안 실력을 키웠던 점이 중요하다. 일찍이 상앙(商鞅) 등의 법가의 사상을 채용하여 과감하고 실용주의적인 개혁으로 부국강병을 이룰 수 있었다. 거기에 더하여 진시황이라는 뛰어난 지도자가 보여준 리더십이 가장 큰 역할을 하였다고 본다.

 

통일을 이룬 직후 스스로의 공업(功業)을 상고(上古)시대의 삼황오제(三皇五帝)의 업적과 견줄 만하다고 자부하면서 '황제(皇帝)'라는 새로운 칭호를 제정하고 '시황제(始皇帝)'라 자칭한 것이다. 진의 통일 후에 그는 모든 것을 수렴하여 통일을 이루고 체계화시키는 융복합적 사고를 가지고 나라를 통치하였다. 먼저 통치 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해 군현제(郡縣制)를 실시함으로써 사상 처음으로 거대 규모의 중앙 집권을 강력히 추진하였는데 이는 후대 중국뿐 아니라 주변국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나라들의 모범을 만든 것이다.

 

그리고 문자, 화폐, 도로와 도량형을 통일하여 거대한 제국을 유지해나갔다. 국론 분열을 방지하기 위해 법가 일변도의 강력한 사상 통제 정책을 실시한 것은 봉건제를 이상적으로 여기는 유생들의 반발을 사면서 분서갱유(焚書坑儒) 등의 부작용을 낳긴 하였지만 제국 초기 통일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북방 이민족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만리장성(萬里長城)을 쌓고 황제의 위엄을 만방에 과시하기 위해 어마어마한 규모의 여산릉(麗山陵)과 아방궁(阿房宮) 등을 축조하게 하여 백성을 고통에 빠지게 하고 국력을 고갈시킨 것은 그의 사후 얼마 되지 않아 나라를 멸망케 하는 지름길로 가는 길이었음은 안타까운 노릇이 아닐 수 없다. 강력한 카리스마와 통치력을 지녔던 진시황이 사망한 후 진제국은 곳곳에서 민란이 일어나서 한순간에 와해됨으로써 불과 5년 만인 BC. 206년에 멸망했기 때문이다.

 

제갈공명(諸葛孔明, 181~234)

다음 동양에서는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가장 똑똑한 사람으로 여겨왔던 제갈공명(諸葛孔明, 181~234)을 대표적인 융복합형 인물로 볼 수 있다. 본명은 제갈량(諸葛亮)인데 중국 삼국시대에 활약한 촉한(蜀漢)의 재상(宰相)으로서 전략가이자, 행정가, 정치가, 발명가, 문인이었다. 불과 20대 중반에 이미 재야의 현인(賢人)으로 명성을 얻었던 그는 유리방황하던 유비(劉備)의 삼고초려(三顧草廬)에 부응하여 책사가 되어 천하를 삼분하는 계책으로 유비가 형주(荊州)와 익주(益州)를 차지하게 하였다.

 

위(魏)나라의 조조(曹操), 오(吳)나라의 손권(孫權)과 함께 중국대륙을 삼분하고 나서 손권과 연합하여 조조의 대군을 적벽(赤壁)에서 대파한 것이 가장 큰 공적이라고 할 수 있다. 정치 방식이나 활동에서 나타난 사상을 보면 학문적으로 제자백가를 통달하는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는데, 융복합적 사고를 가지고 유가(儒家), 법가(法家) 뿐 아니라 손자병법의 이론까지 적절히 조화시켰다. 그는 많은 방면에서 다재다능한 역량을 보여주었는데, 전략가로서 인간의 마음을 읽어내는 심리술에서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신비한 능력이 있는 것처럼 과장되기도 하였지만 제갈량은 사람의 마음을 보고 읽었고, 그것을 능수능란하게 활용할 줄 알았던 것이다.

 

군사면에서는 군대 배치와 작전 방안인 팔진도(八陣圖)를 창안하여 군대의 훈련, 행군, 숙영(宿營)과 전투 시에 여러 상황에 효율적으로 대처할 수 있게 하였고, 식량을 운반하는 목우유마(木牛流馬)와 화살이 연속 발사되는 연노(連弩)를 발명하였다. 그 외에도 공명등(孔明燈)이라고 하는 종이로 만든 등을 발명하였다. 학자와 문인으로서도 뛰어났는데, 대표적인 산문(散文)으로 󰡔출사표(出師表)󰡕 외에 󰡔융중대(隆中對)󰡕, 󰡔계자서(誡子書)󰡕 등의 작품을 남겼다.

 

 

제3장 동서양 중세~근세

 

3-1.서양 중세 (AD. 6~16세기)

 

토마스 아퀴나스(1224~1274)

서양에서 중세(AD. 6~16세기)는 기독교가 종교뿐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면에서 세상을 지배하던 시대였기 때문에 창의적이고 융복합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런 중에서도 토마스 아퀴나스(1224~1274)는 특별히 융복합적 사고를 통하여 세상을 변화시키는데 큰 역할을 한 사람이다. 그는 중세의 스콜라 신학을 집대성하고 완성시킴으로써 교부시대의 어거스틴을 방불케 하는 걸출한 신학자이다. 이태리 나폴리에서 아퀴노 백작의 아들로 태어나서 어려서는 베네딕트 수도원에서 수학하였고, 그 후 나폴리 대학에서 배우다가 도미니크 교단에 수도사로 들어갔다.

 

그는 평생 도미니크 교단에 몸담고 활동하였는데, 독일 콜론에서 스승인 알베르투스 마그누스를 만나 그의 영향으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심취하게 된다. 그 후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연구하고 자기 신학의 종합•분석적 도구로 사용하여 기독교의 사상을 철학적인 용어로 설명하였다. 그는 스승인 알베르투스보다 뛰어난 체계화의 능력을 가지고 아리스토텔레스뿐 아니라 플라톤, 헬레니즘, 아랍 철학 등 수많은 철학 분야를 모두 연구하여 종합하고 체계화시킴으로써 새로운 조화를 이루어 토마스주의(Thomism)라는 신학체계를 만들어 냈다.

그는 탁월한 저술을 많이 남겼는데, 『존재와 본질(De ente et essentia』, 『진리론(De Veritate)』 등은 형이상학적인 내용을 담은 작품이고,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주해도 썼으며, 가장 유명한 것은 『신학대전(Summa Theologica)』이다. 이 책은 기독교 신앙에 대하여 체계적인 이해를 돕는데 크게 공헌하였고, 카톨릭 교회의 신학을 대표하면서 이후 조직신학의 한 표준적 틀로서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그는 모든 존재하는 지식은 종교와 관련을 맺은 결실이라고 하였다. 즉, 사람의 영혼에게 두 가지 지식의 원천이 있는데,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계시(啓示)와 자연을 통한 인지라는 것이며, 이 둘은 모두 하나님을 아는 인식 원리가 된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성(理性)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정도에 머물며, 계시(啓示)가 하나님의 본질을 밝혀준다고 하였다. 아퀴나스는 신학자이면서 동시에 박학한 성경해석자로서 성경의 문자적 의미의 중요성과 역사적 해석을 강조하였다.

 

어거스틴의 영향으로 풍유 또는 알레고리 해석이 주류였던 중세시대에 문자적 해석을 중요하게 부각시킨 그의 주장은 새로운 것으로 그이 주장과 사상은 이후에 많은 영향을 주면서 성경 원어연구를 활발하게 하고, 성경의 역사적 해석이 쏟아져 나오게 하는 자극을 주었다. 이는 결국 신학과 성경해석이 분리되는 결과를 낳았다. 해석자의 자의적 판단에 의존하는 이러한 풍토는 점차 지양되면서 합리성과 객관성이 중요시 되는 시대적 요구를 반영하는 새로운 해석의 길이 열리게 된 것이다. 이는 후기 스콜라 학파의 성경해석의 새로운 전통으로 자리 잡으며, 나아가서 고전 연구에까지 물고를 틔게 함으로써 서양 고전에 대한 활발한 연구는 결국 15세기 초 문예부흥을 촉발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교황과 교회의 절대적 권위로 세상을 통치하며 서양의 암흑기로 불리던 1000년의 중세는 16세기의 종교개혁으로 무너지고 말았다. 종교개혁이 성공함으로써 새로운 시대가 열리게 된 것은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15세기에 이미 문예부흥을 통해 인간중심의 사상이 지식인들 가운데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교회가 세상을 절대적으로 지배하던 중세에 인문주의(人文主義)라고 하는 문예부흥의 발흥은 십자군 전쟁의 패배로 인한 교황의 절대적 권위에 대한 의심에서 비롯되었다. 그 후 성직자들의 타락과 경쟁적인 교회건축으로 인한 국가재정의 고갈이 심화되는 가운데 인간존중 의식이 고취되면서 중세가 무너질 조짐은 깊어져 갔던 것이다. 종교개혁은 루터(1483~1546)와 칼뱅(1509~64) 등을 중심으로 유럽 각지로 퍼지면서 성공을 이루어갔는데, 종교개혁에 본격적으로 불을 지피게 한 인물은 인문학자인 에라스무스(1466~1536)였다. 그는 종교개혁의 전면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중세 카톨릭 교회의 타락을 준열하게 비판하고, 성경의 복음 정신으로 복귀할 것을 역설하여 종교개혁에 큰 영향력을 끼쳤다. 따라서 그는 종교개혁의 선봉에 섰던 마르틴 루터가 성공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함으로써 종교개혁을 가능하게 만든 사람으로 볼 수 있다.

 

에라스무스

 

에라스무스는 네덜란드에서 사생아로 출생하였는데, 9살 때부터 수도원에서 양육되면서 20살쯤 되어서 정식 수도사가 되었고 주교(主敎)의 비서도 하면서 파리 대학에서 신학과 라틴 고전을 연구하였다. 그는 융복합적 사고를 가지고 과거로부터 당대로 전해져온 다양한 학문을 섭렵하고 자신의 새로운 것으로 만들어 가는 작업을 꾸준히 하였다.

 

생활을 위해 라틴어 개인교수를 하다가 영국으로 건너가 토마스 모어 등의 인문학자와 알게 되었다. 그후 파리로 돌아와서 헬라어 공부를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성경 연구에 몰두하였다. 이 시절부터 카톨릭 교회 제도에 대하여 서서히 비판적인 경향을 띠었다. 그가 런던에 있을 때 모어의 집에서 쓴 『우신예찬(Encomium Moriae)』에서는 ‘어리석음의 여신’이 등장하여 세상에는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 많은가를 열거하여 어리석음에 놀아난 세상을 비웃는다. 여기서 그는 여신의 승리를 자랑하는 형식을 취하면서 철학자와 신학자들의 공허한 논의와 성직자들의 위선 등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를 서술하였다.

 

또한 그는 1516년에 『헬라어 신약성경』의 인쇄본을 처음으로 출판하였다. 이를 계기로 초기 사본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자 불가타 라틴역 성경의 오류가 많이 드러나면서 교회의 권위에 손상을 입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카톨릭 교회에 대하여 비판은 할지언정, 교회를 떠나는 것은 좋아하지 않았다. 1517년부터 루터의 종교개혁운동이 격화되었을 때, 루터의 세력들이 그의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지나치게 정열적인 실천행동에는 함께 하지 않았다. 따라서 에라스무스는 그가 맹렬히 비판을 가한 카톨릭 교회뿐만 아니라 좀처럼 한편이 되어주지 않는다고 분노하는 신교도들 모두에게 미움을 삼으로써 곤경에 처한 적도 많았다.

르네상스 ~ 근세 시대

 

한편으로 문예부흥을 가능케 한 배경에는 14~16세기 이탈리아 피렌체를 근거지로 한 메디치 가문이 있었다. 메디치가는 본래 평민가문이었으나 금융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여 마침내 피렌체 공화국의 실질적인 지배자가 되었다. 메디치가의 중요성은 학문과 예술에 대한 장려와 보호를 위해 자금을 아끼지 않음으로써 피렌체를 르네상스의 본거지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당시 역사적 배경으로는 1453년 동로마 제국이 오스만 터키에 의해 멸망당한 후에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인문학자들이 유럽으로 피신하던 길에 자연스럽게 피렌체로 집결하였는데, 그것은 메디치 가문이 이들 헬라어권 인문학자들을 영입하기 위하여 그리스 아카데미를 세우고 수많은 고전 문헌들을 수집하여 제공함으로써 이들로 하여금 고대 그리스 역사와 문화를 연구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주었기 때문이다. 메디치 가문이 이들을 우대하자 주변국의 더 많은 인문학자들이 피렌체로 몰려들어 고대 그리스로 돌아가자는 슬로건 하에 인문학 연구가 시작되었다.

 

당대의 유명한 조각가, 과학자, 시인, 철학자, 금융가, 화가들이 피렌체로 와서 자유롭게 교류하고 서로 소통하면서 협력 관계를 맺으며 새로운 사상에 바탕을 둔 르네상스 시대를 열게 된 것이다. 르네상스는 이렇게 피렌체에서 꽃을 피워 전 유럽으로 확장되어 나갔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와서 ‘메디치 효과’라는 용어가 등장했다. 혁신적인 아이디어가 교차점(交叉點)에서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현상을 말한다. 즉, 메디치 효과란 어떤 분야의 전문가가 자신만의 관점에 빠져 새로운 변화에 둔감해지고 아이디어가 고갈되기 쉽기 때문에 같은 분야의 한정된 사람만 만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분야의 서로 다른 지식이나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만나 교차하고 융합하면서 창조와 혁신의 빅뱅을 일어나게 하는 현상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

 

르네상스 시대 인문주의자들은 대부분 융복합적 사고의 사람들이었다. 즉 사물의 다양성을 분석하여 통합함으로써 새로운 것을 창출해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를 들 수 있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융복합형 인물로 평가된다. 귀족 가문의 피를 물려받지 않은 사생아 출신으로 의사나 법률가가 될 수 없고 대학에도 갈 수 없었던 그가 처음에 선택한 것이 화가였다.

 

당시 유명한 화가들의 견습생으로 들어가서 배우다가 단지 그들을 따라하는 것을 넘어 자신만의 방법을 개발해 나갔다. 그는 화가로서만이 아니라 건축, 철학, 시, 작곡, 조각, 체육, 물리학, 수학, 해부학, 의학, 심지어 악기를 다루고 만들기까지 함으로써 음악에도 조예가 있는 만능인이었다. 또한 그는 발명가로서 토목에 손을 대어 직접 수차(水車)와 수문을 만들고 방대한 영지를 관개하는 새로운 방법을 개발하기도 했다. 비행기와 잠수함을 설계하기도 하였고 기중기와 자동 드릴을 제작하는 새로운 방식을 고안하기도 하였다. 더군다나 그는 지칠 줄 모르고 일을 하면서 하루에 몇 시간만 쉬고 날마다 20시간 동안 끊임없이 수학을 연구하고, 과학적 설계와 그림에 몰두하였다. 예술과 과학에 정통했던 그가 모든 일들을 어떻게 훌륭히 해낼 수 있었는지는 수수께끼로 남아있을 정도다.

 

르네 데카르트(1596~1650)

 

서양 근대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르네 데카르트(1596~1650)는 전형적인 융복합형 인물이다. 합리주의 철학의 창시자일 뿐 아니라 법학자이기도 하고, 해석기하학을 창시한 수학자이며, 빛의 굴절법칙을 발견한 과학자이고, 해부학에 조예가 있는 의학자이기도 하다. 한두 가지에 전념해서 경지에 이르기가 쉽지 않은데, 여러 분야를 연구해서 각각 수준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는 프랑스 투렌 지방의 법관이었던 부친의 영향으로 법학을 공부해서 박사까지 되었으나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다른 분야의 많은 공부를 하였고 30대 초반에 벌써 프랑스 학술계에 알려진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스콜라 신학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취하며 인간의 이성을 중시하는 그의 사상을 교회에서 위험하다고 여겼고, 그의 저작들은 교황청에 의해 금서가 되기도 했다. 따라서 비교적 자유로운 나라였던 네덜란드로 이주하여 주로 거기서 활동했는데 평생 독신으로 지내며 많은 책과 논문을 발표하고 끊임없는 연구의 삶을 살았다. 그는 어떤 것이든 분명하고 확실한 근거가 있어야 한다는 신념 아래 다양한 지식을 추구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근대적 합리정신의 시작이 되었다. 그는 인간의 지식 연구의 목적은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고 기술을 개발하며 원인과 결과의 연관을 취하여 인간 본질을 개선하는 데 있다고 보았다. 󰡔방법서설󰡕에서 그는 학문에 있어서 조금이라도 불확실한 것은 모두 의심해야 하지만 모든 것을 의심하는 자신의 존재만은 의심할 수 없다고 하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는 근본 원리를 제시하고, 이러한 원리 위에서 학문을 통일적으로 재건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엄밀한 논증적인 지식인 수학에 근거하여 철학(형이상학), 의학, 역학, 윤리학 등을 포함하는 학문 전체를 '보편학'으로 정립하고자 했다. 곧 수학적 방법을 모든 학문에 보편적으로 적용하고자 하였다. 그는 단지 다양한 지식의 소유자가 아니라 많은 지식을 활용하여 학문간의 융복합적 결합을 시도하고, 새로운 방향 제시를 함으로써 근대 철학을 태동하게 한 것이다.

 

바흐(1685~1750)

 

근세 융복합형 인물로 바흐(1685~1750)를 빼놓을 수 없는데, 바흐 이전에도 비발디 등 유명한 음악가들이 있었지만 바흐를 음악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그가 융복합적 사고를 가지고 이전까지의 모든 음악 이론을 집대성하여 후대에 넘겨줌으로써 음악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기 때문이다. 그는 기악과 성악이론을 정립하고, 화성학과 대위법(對位法)을 비롯한 연주법과 작곡에 이르기까지 체계적인 음악 이론들을 완성하여 후대에 전해줌으로써 모짜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같은 훌륭한 작곡 연주자들이 나올 수 있었다. 현재까지 아름답게 들려주는 많은 음악의 정화(精華) 모두가 바흐라는 최고의 예술을 원천으로 해서 흐르기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나중에 방대한 자신의 작품을 정리, 개정, 출판하는 것이 주된 일로 삼았는데, 전통성과 미래성을 종합하여 만들어낸 자신의 음악을 후대에 전하는 것이 중요하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바흐는 독실한 프로테스탄트로서 종교음악을 많이 만들었지만 그의 음악이 종교라는 테두리를 넘어 오늘날도 아직 커다란 인간적 감동을 부르고 있다. 그것은 전통만을 고수하지 않고 새로운 것을 창안하여 융합함으로써 도전 정신이 근대적인 시민정신에 부합되어 나타난 결과일 것이다.

 

드니 디드로(1713~84)

 

드니 디드로(1713~84)는 18세기 프랑스 계몽주의를 대표하는 프랑스 백과사전파의 효시로서 당시 교회의 심한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수많은 지식을 집대성하여 백과전서를 완성하였다. 그는 융복합적 사고를 가지고 다양한 지식을 추구하면서 많은 분야에서 공헌하였는데, 철학자로서 근대적 유물론의 기초를 세웠고, 소설가로서 기존 소설 형식을 송두리째 뒤엎은 실험소설들을 집필했으며, 극작가로서 고전 비극과 희극을 통합하는 부르주아 드라마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발하였다. 또 미술비평이라는 장르도 개척했다. 다양한 활동 중에서도 계몽주의자로서 디드로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고 후세에 가장 큰 영향을 남긴 것은 바로 그의 ‘백과사전’이다. 프랑스인을 위해 전통적 제도와 편견(偏見)에 대한 투쟁의 무기로 새로운 백과전서를 계획하고 참고할 만한 선례가 없는 상황에서 7만개에 가까운 표제어들을 뽑아내 이 방대한 책을 구상했다. 여기에는 당시의 혁신적인 세계관이 과학과 기술 등 광범위한 분야에 걸쳐서 집약되어 있는데, 달랑베르, 볼테르, 루소, 몽테스키외, 케네, 돌바하, 엘베시우스, 튀르고 등이 집필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교회의 탄압으로 중간에 대부분 이탈하고 디드로만이 곤란한 상황에서 최후까지 노력을 계속하였다. 사전의 전체적 분위기가 인간 이성(理性)을 주장하였고 신학과 로마 가톨릭교회와 절대 왕정에 대한 비판이 강하였기 때문에 당국으로부터 탄압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디드로는 끝까지 벼텨내어 1772년에 본문(本文) 19권과 도표(圖表) 11권의 대사전을 완성하였다. 이 백과사전은 여러 사상가들이 집필하였기 때문에 전체로서의 사상적 통일성은 결여되어 있으나 계몽사상의 발전, 특히 프랑스 혁명(1789년)의 사상적 준비라는 점에서 큰 역할을 하였음은 부정할 수 없다.

우리나라 역사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역사는 결국 융복합적 사고를 가진 리더들이 이끌어온 것인데, 우리나라 역사에도 융복합형 인물은 많이 있었다. 그들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세종과 정조, 정약용 등의 실학자들이다.

세종(1397~1450, 재위 32년)

 

조선 초의 세종(1397~1450, 재위 32년)은 우리나라 역사를 통틀어 역대 어떤 왕보다 많은 업적을 남긴 훌륭한 왕으로 존경받고 있다. 고려에서 조선이라는 나라로 통치세력과 건국이념 정도가 바뀐 것이 아니라 백성이 편히 살 수 있는 새로운 세상을 열고자 하는 일념으로 노력한 군주였다. 국내외 정세를 읽으면서 조선이 시대의 흐름에 앞서가는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고려로부터 전해져온 문화와 전통에 새로운 기운을 불러 넣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융복합 마인드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그는 시대가 요구하는 당면한 문제들을 해결하면서 미래를 위해 필요한 것들을 준비하며 국가를 안정시키고 번영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 놓으려고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세종의 업적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단연코 한글의 창제인데,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는 한글을 후세에 전해주었기 때문에 오늘날 한국이 정보화 시대에 유리한 고지를 쉽게 점령할 수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한글은 세상의 수많은 문자들 중에 만든 사람과 연도가 명확히 밝혀져 있는 문자이다. 제자(制字) 원리의 음운학적인 독창성과 과학성, 학습의 용이성은 어떤 언어와도 비교할 수 없이 놀라운 발명품이라는 것은 유네스코(UNESCO)를 비롯하여 전세계가 인정하고 있다. 한글 창제는 세종이 다방면의 풍부한 지식을 가진데다 다양성 속에서 새로운 것을 창출하는 융복합적 사고를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한글 창제 외에도 문화 정책면에서 인쇄와 출판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주자소(鑄字所)를 설치하여 편하게 사용할 수 있는 새로운 활자들을 만들도록 하여 인쇄 능률을 올렸다. 발달된 인쇄술을 활용하여 수많은 책자들을 편찬하도록 하였는데, 내용별로 보면, 훈민정음을 비롯하여 유교경서, 윤리와 의례서, 역사서, 중국의 법률, 문학서, 정치귀감서, 천문지리서, 농서 등으로 다양하고 방대하였다. 즉, 정치•법률•역사•유학•문학•어학•천문•지리•의약•농업기술 등 각 분야에 걸쳐 종합 정리하는 사업으로서 이를 통해 조선 초기의 문화 수준을 한 단계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렸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세종은 음악에도 조예가 많아서 악보인 정간보(井間譜)도 창안하고, 몇몇 음악을 직접 작곡하기도 하였다. 편경(編磬) 등의 악기(樂器)를 제작하게 하였고, 박연(朴堧)을 시켜 향악(鄕樂)과 아악(雅樂)을 짓게 하였다.

기술면에서는, 고려시대로부터 조선시대까지 계속되어왔던 유교적 계급구조인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는 사회적 체제 속에서 기술을 천대하였던 것과 달리 세종은 오히려 기술을 장려하고 관노 출신의 장영실 같은 사람을 우대하여 벼슬을 내리면서까지 많은 발명품을 만들게 하였다. 세종 때에 천체측량을 위한 혼천의(渾天儀), 간의(簡儀), 물시계인 자격루(自擊漏)와 해시계인 앙부일구(仰釜日晷), 측우기(測雨器), 하천수(河川水)를 재는 수표(水標) 등이 발명되었다. 그리고 화전(火箭)과 화포(火砲)를 개량하여 무기의 일대 혁신을 가져왔다. 경제 정책면에서도 󰡔농사직설(農事直說)󰡕을 편찬하여 농업 발전을 도모함으로써 백성들의 삶이 나아질 수 있도록 해주었고, 도량형의 개선과 합리적인 조세제도의 확립으로 조선조 500년의 기준이 되게 하였다. 의료기관을 정비하고 많은 의서(醫書)를 편찬하여 백성들이 건강하게 살 수 있도록 애쓰기도 하였다. 노비들의 인권(人權)에도 관심을 보여 그들을 양반의 소유물이 아닌 하늘이 똑같이 낸 백성으로 인정해 주었다.

영토와 국방에 있어서도 탁월한 업적을 남겼는데, 즉위 초에 이종무(李從茂)로 하여금 대마도(對馬島)를 토벌하게 하고, 후에는 북방 지역의 야인들을 토벌하여 압록강 변에 사군(四郡)을 설치하고, 김종서(金宗瑞)로 하여금 여진(女眞)을 토벌하고 두만강 변에 육진(六鎭)을 설치하게 함으로써 세종 시대에 압록강과 두만강이 경계로 확장되었고 오늘날까지 한반도의 영토가 되게 한 것이다. 즉 문치(文治)에만 힘쓰지 않고 군사훈련과 화기의 제조와 개발, 성진(城鎭)의 수축, 병선(兵船)의 개량, 병서(兵書)의 간행 등 국방정책에도 힘을 기울인 결과인 것이다. 외교적으로는 조선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 중국과는 사대교린(事大交隣) 정책을 쓸 수밖에 없었고, 동쪽의 일본에 관해서는 강경책과 회유책을 함께 썼다. 아무튼 세종은 후대에 물려줄 모든 제도를 자신의 재위 시절에 대부분 완성하여 국태민안(國泰民安)과 문화가 찬란한 황금시대를 이룩하였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모든 것이 세종 한 사람의 힘으로 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호학(好學)의 군주였던 세종은 융복합적 마인드를 가지고 통치하는 한편, 인재들을 사랑하여 중용함으로써 풍부한 인적 자원을 가질 수 있었고 결국 이들은 세종대가 찬란한 문화와 정치적 발전을 이루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정조(1752~1800, 재위 24년)

정조(1752~1800, 재위 24년)는 조선의 제22대 왕으로서 조선의 르네상스를 연 계몽(啓蒙)군주로서 조선 후기 개혁과 대통합을 추진하였으나 갑작스런 죽음으로 새로운 조선의 꿈을 펼치지 못한 비운의 왕이었다. 정조 이후 조선은 급속히 쇠망의 길을 가게 된다. 조씨와 김씨 등의 외척의 세도정치로 부패와 학정이 만연한 가운데 잦은 민란이 발생하고 마침내 대원군과 민비의 갈등과 쇄국정책 등이 이어져 정조 사후 백여 년 만에 조선은 망하여 일본의 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사도세자의 아들이었던 정조는 아버지의 비극적인 죽음의 트라우마를 겪으면서 지난한 과정을 거쳐 왕위에 올랐으나 개혁 정책을 실시하고 탕평을 통해 대통합을 추진함으로써 세종대왕 이후 다시금 조선의 문화를 꽃피우는 르네상스에 비견한 시대를 구가할 수 있었다. 학문을 사랑하여 수불석권(手不釋卷)으로 일평생을 보내었던 그는 학자(學者)군주로서 다양한 지식을 소유하였으며 대단한 융복합적 마인드를 가지고 시대가 요구하는 개혁적인 사업들을 창의적으로 추진하였다. 인재를 중시하여 당파를 가리지 않고 체제공, 정약용, 유득공, 이덕무, 박제가 등의 인물을 적재적소에서 활용하였으며, 시대의 흐름을 읽고 청나라의 선진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국익을 도모하려고 하였다. 또한 세종 때 제정되고 확립되어 조선조 내내 이어져온 문물제도를 조선후기 사회에 맞추어 재정리하는 일에도 힘을 쏟았다. 세종 때와 마찬가지로 많은 서적을 간행하고 새로운 활자도 만들었는데, 여러 가지 면에서 볼 때 정조는 아마도 세종대왕을 자신의 롤 모델(role model)로 삼은 것 같다.

정조는 자신이 꿈꾸는 이상국가를 만들기 위해서 인재들의 도움이 절실하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성균관(成均館)의 유생 교육은 물론 즉위 초에 규장각(奎章閣)이라는 왕실 도서관을 만들어 초계문신(抄啟文臣) 제도를 실시함으로써 인재양성에 힘을 쏟았다. 그의 시대에 많은 문인들과 실학자들이 등장하여 조선의 문예부흥이 시작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교육정책에 힘입은 바가 컸다. 정조는 당파를 초월하여 능력있는 신하들을 발탁하였는데, 영조시대에 소외되었던 계층인 남인(南人)들과 소론(小論)들도 대거 기용되었다. 조선의 당쟁(黨爭) 역사는 복잡하지만 조선중기 이후 영조시대까지 노론(老論)의 세력이 장기집권하다시피 하고 있었다. 노론은 왕권(王權)보다 신권(臣權)의 우위를 주장하며 그동안 왕들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자신들의 세력을 구축해왔다. 한편, 조선중기부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국가존망이 걸린 침략을 당하고 중종반정과 인조반정의 정치적 혼란을 겪으면서 조선조의 정치이념인 성리학(性理學)은 변질되어 버렸다. 장례기간이나 상복문제 등 이른바 예송논쟁으로써 당쟁을 일삼으며 반대파를 숙청하는데 명분을 삼는 공리공론의 예학(禮學)으로 전락하였던 것이다. 노론은 그 중심에 있으면서 반대파를 숙청하고 집권을 유지해왔기 때문에 정조로서는 할아버지 영조처럼 그들을 의지할 수 없었다. 그러나 소외되었던 남인(南人)들은 강력한 국가를 만들기 위하여 절대적 힘을 가진 군주의 통치를 주장하며 정조에게 힘을 실어 주었다. 따라서 강력한 왕정통치를 통해 새로운 조선을 만들고자 꿈꾸는 정조로서는 허울뿐인 왕이 되지 않으려면 왕권을 옹호하는 남인들에게 기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남인(南人)과 가까웠을지라도 노론의 신진 학자들도 대거 기용하여 국정을 운영함으로써 탕평을 이루었다. 또한 당시의 실학의 여러 학파들의 장점을 수용하고 학풍들을 특색있게 장려함으로써 문예발전을 진작시켜 나갈 수 있었다. 이를 통해 조선의 문예부흥 시대에 걸맞게 많은 작품들이 쏟아져 나오게 되었다. 정조가 독단에 흐르지 않은 것은 융복합적 사고를 가지고 다양성을 포용하며 수렴하고 통합하여 새로운 것을 창출하는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조가 시행한 개혁은 문화사업이 대종을 이루지만 무엇보다 큰 업적은 수원시에 화성행궁(華城行宮)의 건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부친이었던 사도세자를 추존하며 이장하는 명분으로 시작하였지만, 실제로는 권신(權臣)들의 뿌리가 깊은 서울에서 벗어나 신도시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정치적 구상 아래 진행된 것이었다. 정조는 화성을 단순한 군사적 기능을 수행한 성곽으로 생각하지 않고 개혁을 통해서 얻어진 결과를 시험하는 무대로 삼으려고 했던 것 같다. 축성(築城)을 위해 가장 아끼던 신하인 정약용을 책임자로 세워 주도하게 하였다. 이를 통해 당시로서 많은 선진적인 기술 개발이 이루어짐으로써 기술의 발전을 도모할 뿐 아니라, 제2 수도로서의 기능을 다하는 국방의 안전까지 대비할 수 있었다. 정조는 화성을 포함한 수원 일대를 자급자족 도시로 육성하기 위해 국영 농장인 둔전(屯田)을 설치하고 저수지도 축조하여 선진적인 농법을 시험적으로 추진하였다. 화성은 조선후기의 조선후기 정치와 군사, 사회, 문화의 면모를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유산으로 남게 되었다. 이밖에도 왕권 강화를 위해 왕의 호위부대인 장용영(壯勇營)을 설치하고, 경제적으로는 통공정책(通共政策)을 통하여 특권세력이 장악하고 있는 도성 중심의 경제권을 약화시키고 시장공간을 확대하여 자유로운 상행위가 가능해져 상업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군사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을 편찬하는 등 재위기간 동안 많은 정책을 시행하였다. 그리고 당시 정치문제였던 서학(西學)에 대해서도 무자비한 탄압보다는 정학(正學)의 진흥을 통해서 이길 수 있다는 원칙 아래 유연하게 대처한 점도 높이 평가할 만하다.

그러나 재위 말기인 1794년 소위 ‘문체반정(文體反正)’이라는 문풍(文風)의 개혁론을 통해 한문의 문장체제를 순정고문(醇正古文)으로 회복하자는 주장을 하였다. 이를 통해 소설류의 패관잡기(稗官雜記)의 잡문(雜文)을 금지함으로써 문학 발전을 저해하는 결과를 낳았다는 비판을 받게 되었는데, 실시된 배경은 자유로운 문학을 탄압하여 후퇴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목적이 있었다고 본다. 당시 청나라 문물을 무작위로 추앙하며 받아들이려는 북학파들이 대부분 노론에 속해 있었고 박지원의 열하일기와 허생전 등을 비롯한 그들의 작품이 정통 고문이 아니라 자유로운 형식의 패관잡기가 주류였기 때문에 이들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이었다는 것으로 이해된다. 문체반정은 신권(臣權)의 우위를 주장하며 그동안 왕들을 마음대로 움직이면서 자신들의 세력을 구축해온 노론의 세력을 견제하려는 의도로 진행되어 남인과 노론 간의 정치적 갈등을 해결하고 탕평을 시행하려는 의도였다고 보는 것이다. 정조는 왕이란 통치자일 뿐만 아니라 학문적으로 도덕적으로도 모범을 보이는 큰 스승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몸소 실천해 보였다. 그는 조선시대 27명의 왕 가운데 유일하게 『홍재전서(弘齋全書)』라는 문집을 남겼는데, 그 양도 방대하여 180권 100책에 달하였다. 학문을 숭상하며 탁월한 능력과 식견을 가지고 신하들을 영도하며 문화국가를 통치한 정조가 위대한 융복합형 인물이었음은 틀림없다.

유형원(1622~1673)

한편 조선시대 실학(實學)은 성리학의 공리공론을 뛰어넘어 실용주의를 표방하는 사상으로 광해군 때부터 현종 때까지의 인물인 유형원(1622~1673)이 가장 먼저 주장하였다. 그는 관직에 나간 적이 없으나 저서인 󰡔반계수록(磻溪隧錄)󰡕에서 많은 개혁적인 사상을 피력하며 이상국가(理想國家)론을 주장하였다. 정도전의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이 조선조의 제도개혁과 기틀을 마련하는데 기여하였고, 성종 때 『경국대전(經國大典)』으로 완성되었다면, 『반계수록』은 기존의 법전에서 파생된 그동안 발견된 폐법과 오랫동안의 인습으로부터 야기되는 폐단을 전면적이고 근본적으로 개혁하려고 시도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갖는다. 그는 비록 은둔하였지만 융복합적 사고를 가지고 시대를 읽으면서 미래 조선의 청사진을 제시하려고 하였다. 토지개혁과 병농일치의 군제개혁, 세제의 개선, 효과적으로 국가재정을 늘리는 방안, 상공업의 장려, 당시 폐단이 극심한 과거제도의 폐지와 공거제(貢擧制)의 실시, 관아(官衙)의 정비 등이 포함되었다. 이러한 제안에는 이상적인 국가건설의 뜻이 담겨있으며, 그의 사후 영조(재위 1724~1776)는 이러한 뜻을 이해하고 특명을 내려 『반계수록』을 간행하도록 하였고, 영조 이후 국정개혁의 지표가 되었다.

 

유형원의 실학은 후대로 전해져 영향을 끼치면서 경세치용파(經世致用派), 이용후생파(利用厚生派), 실사구시파(實事求是派)의 세 종류로 구분하게 된다. 실학은 공리공론의 예학으로 전락한 성리학보다 실제적으로 백성을 이롭게 하고 국가를 부강하게 할 수 있는 실용적인 주장이었으므로 소외된 계층이었던 남인들이 많이 수용하였다. 먼저 경세치용파(經世致用派)는 󰡔성호사설(星湖僿說)󰡕의 이익(1681~1763)을 대종으로 하는데 토지제도 및 행정기구 기타 제도상의 개혁에 치중하였다. 이익 역시 관직에 나간 일 없었으나 후학 양성에 노력하여 성호학파(星湖學派)를 형성하였다. 그의 문하에는 동사강목(東史綱目)의 저자인 안정복(1712~1791), 서학파(西學派)의 대가이며 천주교인이었던 권철신(1736∼1801), 정약용(1762~1836)과 정약전 등이 속한다. 이용후생파(利用厚生派)는 연암 박지원(1737~1805)을 중심으로 하는데 상공업의 유통 및 생산기구, 일반기술면의 혁신을 지표로 하며 박제가, 홍대용, 이덕무, 유득공 등이 속한다. 실사구시파(實事求是派)는 완당 김정희(1786년~1856)에 이르러 일가를 이룩하게 된 학문으로 경서(經書)와 금석(金石)•전고(典故)의 고증(考證)을 위주로 하는 객관적, 과학적 태도를 통한 학문을 말한다. 󰡔학해(學海)󰡕를 지은 홍성주(1774~1842) 등이 속한다. 실학자들은 이같이 서로 다른 당에 속하고 학문의 분야도 약간씩 달랐으나 이념과 방법에 있어서는 모두 공리공론의 성리학에 염증을 느끼고 실용과 실증(實證)을 강조하며 조선을 계몽하여 새로운 나라를 만들고 싶어했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비록 당시의 역사적 제약 때문에 조선의 근대화를 이룩해내지는 못했지만 시대에 앞서간 개척자로서 실학자들을 융복합형 인물로 보는데 무리가 없다.

다산(茶山) 정약용(1762~1836)

다산(茶山) 정약용(1762~1836)은 한국을 대표하는 융복합형 인물이다. 서양을 대표하는 융복합형 인물에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있다면 우리나라엔 그가 있다. 정조와 함께 조선을 새롭게 바꾸기를 꿈꾸었던 애민(愛民)의 개혁주의자 정약용은 실학사상가이자 정치가, 문학인으로서 과학과 의학에도 조예가 깊은 융복합형 지식인이었다. 그는 전통적인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였지만 세상을 진보시킬 수 있는 실용주의적 학풍의 실학(實學)에 매료되었다.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탐구심을 가지고 일평생 책과 씨름하며 공부를 즐기는 가운데 독서와 관찰력을 통해 세상을 밝히는 융복합적 사고를 키울 수 있었다. 그의 개혁사상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사상 등 각 방면에 걸쳐 제시되고 있다. 그의 저술인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경세유표(經世遺表), 목민심서(牧民心書) 등에 나타난 개혁사상을 요약해 보면, 정치적으로는 맹자가 말한 바 민본주의적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주장하였다. 당쟁을 일삼으며 왕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특권을 누리는 권신들의 횡포를 목격하면서 조선이 강한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군주의 절대권이 보장되어야 하며 따라서 현명한 군주의 힘으로 강력하게 통치되는 왕권강화가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그밖에 새로운 관료제 개혁안과 과거제 개혁론을 주장하고, 사회개혁론을 제기했다. 토지개혁을 통홰 백성의 재산을 보호하고 부역과 조세를 형평성 있게 조절하며, 상공업을 보호할 것을 주장하였다. 농사를 짓지 않는 선비와 기술자와 상인들의 토지 소유를 반대하며, 사족(士族)의 경우에도 농사에 종사하거나 생산 활동을 해야 한다는 주장도 하였다. 조선후기 사회는 상공업이 발전해 가던 시대였는데, 뒷받침하는 정치적 논리는 뒤쳐져 있었다. 따라서 그는 상공업 진흥론을 내세우며 상인들의 지위를 보장하고 유통구조와 시장을 개선하며, 기술면에서는 방적(紡績)을 비롯한 여러 분야에서 국내기술을 발전시키고 생산력을 증대하여 국익을 도모해야한다고 하였다. 국부를 증대시킬 목적이라면 서구와 청나라의 선진기술을 과감히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용감(利用監) 같은 관청을 설치할 것을 제안하였다. 선박과 수레 제조기술을 장려하기 위해서도 국가가 지원하며 주도하에 기술을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고 피력했다.

 

그는 알고 배운 것을 현실에 적용하지 못하면 무익하다고 생각하여 실제로 사용이 가능한 많은 발명품들을 만들어내었고 농업기술 향상에도 힘을 쏟았다. 수원 화성 축조의 책임자로서 수학과 실학을 접목하여 거중기를 발명함으로써 건축기간을 단축할 수 있었다. 사회과학과 공학의 융복합을 200여년 전에 이미 실천했던 것이다. 새로운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서학(西學)이라 일컫는 천주교를 접하여 배움으로써 유교와 천주교를 융복합적으로 이해하려고 하였다. 정조에게 발탁되어 중용되면서 정조의 강력한 후원 아래 개혁을 펴나가던 정약용에게 정조의 죽음(1800년)은 그의 꿈이 하루아침에 좌절되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이었다. 정조가 세상을 떠난 직후 발생한 신유박해(1801년)에서 천주교를 믿었다는 이유로 그의 형과 친척들이 처형되고 그는 동생 정약전(丁若銓)과 함께 강진으로 유배를 떠나게 되었다. 유배지에서도 학문연구와 저술활동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는 정치, 경제를 비롯하여 실학과 의학, 농업, 기술 등의 다양한 분야에서 무려 500여권에 이르는 책을 집필하였는데 방대함에 있어서 동양의 한자문화권에서 유사이래 처음 있는 일이며 논리정연한 서술에 감탄하지 않는 이가 없다. 물론 17년간의 유배생활 동안 남들보다 시간이 많았고 제자들이 도와주었다고는 하지만 농사를 직접 짓고 제자들을 가르치는 일까지 하면서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놀라울 뿐이다. 아무튼 당대 최고의 학자이며 지식인임을 보여준 것이다.

 

다양한 정보를 모아 새로운 지식을 창조하는 것이 융복합적 사고인데, 한 가지 분야에 몰두하여 옆의 다른 것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과 정약용이 달랐던 점은 학문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타당성을 따지고 현재와 맞는 것을 취했던 것이다. 아무튼 정약용은 18세기 무렵 우리나라 사회에서 강력히 제시되고 있던 개혁의 의지를 집대성하고 개혁의 당위성을 명백히 해주었던 인물이었다. 그에게는 개혁을 향한 열정과 함께 빈곤과 착취에 시달리던 백성에 대한 연민과 애정이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그는 시대의 문제점을 밝혀내는 데 과감했으며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고뇌하던 양심적인 지식인이었다. 그러나 다산의 사상과 연구의 결과물들이 제대로 빛을 보지 못하고 조선사회에서 실천되지 못했다는 점에서 정조의 이른 죽음은 더욱 아쉬워진다. 만일 정조와 다산의 개혁이 좀 더 지속됐다면 조선은 근대화를 앞당기고 그들의 꿈대로 새로운 강력한 나라를 만들었을 지도 모른다.

 

 

 

제3장 융복합효과(메디치효과)

 

한편으로 문예부흥을 가능케 한 배경에는 14~16세기 이탈리아 피렌체를 근거지로 한 메디치 가문이 있었다. 메디치가는 본래 평민가문이었으나 금융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여 마침내 피렌체 공화국의 실질적인 지배자가 되었다. 메디치가의 중요성은 학문과 예술에 대한 장려와 보호를 위해 자금을 아끼지 않음으로써 피렌체를 르네상스의 본거지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당시 역사적 배경으로는 1453년 동로마 제국이 오스만 터키에 의해 멸망당한 후에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인문학자들이 유럽으로 피신하던 길에 자연스럽게 피렌체로 집결하였는데, 그것은 메디치 가문이 이들 헬라어권 인문학자들을 영입하기 위하여 그리스 아카데미를 세우고 수많은 고전 문헌들을 수집하여 제공함으로써 이들로 하여금 고대 그리스 역사와 문화를 연구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주었기 때문이다. 메디치 가문이 이들을 우대하자 주변국의 더 많은 인문학자들이 피렌체로 몰려들어 고대 그리스로 돌아가자는 슬로건 하에 인문학 연구가 시작되었다.

 

당대의 유명한 조각가, 과학자, 시인, 철학자, 금융가, 화가들이 피렌체로 와서 자유롭게 교류하고 서로 소통하면서 협력 관계를 맺으며 새로운 사상에 바탕을 둔 르네상스 시대를 열게 된 것이다. 르네상스는 이렇게 피렌체에서 꽃을 피워 전 유럽으로 확장되어 나갔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와서 ‘메디치 효과’라는 용어가 등장했다. 혁신적인 아이디어가 교차점(交叉點)에서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현상을 말한다. 즉, 메디치 효과란 어떤 분야의 전문가가 자신만의 관점에 빠져 새로운 변화에 둔감해지고 아이디어가 고갈되기 쉽기 때문에 같은 분야의 한정된 사람만 만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분야의 서로 다른 지식이나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만나 교차하고 융합하면서 창조와 혁신의 빅뱅을 일어나게 하는 현상이다.

제4장결론

근대 이후 급속한 문명 발전에 밑거름이 되는 중요한 3대 발명품인 종이, 나침반, 화약은 모두 중국에서 발명되었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그것들을 단순한 발명품으로 보고 더 이상 발전시키지 못한 반면, 비단길을 통해서 그 발명품들을 도입한 서구 유럽은 실생활의 여러 분야에서 적절하게 적용함으로써 인류의 문명을 획기적으로 발전시켰다는 사실이 융복합적 사고의 중요성을 일깨워준다.

 

결국 융복합적 사고가 세계를 지배하는 힘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동양이 그렇지 못한데 비하여 유럽은 일찍이 기술 개발이 인간의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음을 인식하고 산업에 철학(哲學)과 기술을 접목하고 통합적 사고를 중시함으로써 오늘날과 같이 발전해온 성과를 이룩할 수 있었다고 본다. 여기에 형이상학(形而上學)적 합리주의(Rationalism)보다는 실제와 경험을 중요하게 여긴 영국의 경험주의(Empiricism) 정신이 영국에서 산업혁명을 시작하게 만들었고 점차 전 유럽으로 퍼져나가면서 근세와 현대에 이르기까지 유럽 대부분의 국가들이 강대국들이 될 수 있었다. 미국은 유럽의 산업혁명에 더하여 프라그마티즘(Pragmatism) 곧 실증주의(實證主義)를 표방하면서 각종 기계, 공업, 산업의 급속도 발전을 이루고 결국 미국이 유럽을 젖히고 최강대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다.

이상에서 창의적이고 융복합적 생각을 가진 인물들이 인류의 역사를 이끌어 진행시켜 왔다는 사실을 세계역사 속에서 확인해보았다. 4차 산업시대인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호모 인테그레투스(Homo Integretus) 즉 융복합형 인재들이 세상을 선도해갈 것이다. 융복합적 사고가 세계를 지배하는 힘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사회와 국가가 발전하려면 이러한 융복합형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어야 한다는 것은 자명하다.

이처럼 융복합의 중요성을 인식한 선진국들이 공학, 의료, 환경 등의 자연 과학을 중심으로 예술, 사회 과학 등이 접목된 융복합 프로그램을 마련하여 미래의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기 위한 인재양성에 힘쓰는 추세인 반면, 우리나라는 아직까지 구체적인 인재양성 교육계획이나 프로그램 개발이 부족한 상태이다. 최근에 융복합이란 용어가 학계와 산업계에서 많이 회자되고는 있으나 아직까지 일반 국민들의 관심은 미미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융복합은 민간에서 자체적으로 알아서 할 문제가 아니라, 부존자원도 없는 우리나라로서는 이제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돌입하면서 국가적으로 힘을 써서 추진하여야 할 중차대한 과제이다. 선진국들과의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는 지금이라도 융복합의 대한 관심을 제고시킬 여러 정책들과 구체적인 방안들이 나와야 할 뿐 아니라 융복합 인재양성을 위한 교육계획도 조속히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벌써 시작된 세계와의 무한경쟁에서 이길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바이다.

동서양의 근대사에서 국가의 지도자가 융복합적 사고를 가지고 있는지 그렇지 못한지에 따라 국가의 존폐가 달려있음을 보았을 때, 과거 어느 때보다 더욱 치열한 무한경쟁 속에서 살아가는 이때에 우리나라에 더 많은 융복합형 인재들이 배출되어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선도해주기를 기대하는 바이다.

 

IACE PROLOGUE
 

인재개발학과 언어교육학 그리고 응용언어공학 등의 융합연구를 바탕으로 학제간 응용적 교육과 컨설팅 현황, 융복합 연구 및 교육현황을 살펴봅니다. 인재개발은 어느 특정 학문의 연구 토대 위에 이룩될수 없으므로 융합적 연구를 기반으로 교육과 컨설팅 등 인재개발이 이루어집니다. 

국제융복합협회는 융복합 전문가들과 한국 융복합 인재 교육의 이론 연구 분야와 교육 시장에서의 여러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기대에 부응하겠습니다. 늘 변함없이 한국융복합 이론과 기술 그리고 인재교육 선진화에 기여하는  협회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저희 홈페이지를 찾아주신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동안 본 협회에 관심과 성원을 보내주신 관계자 여러분께 깊은 감사 드리며 앞으로 계속적인 관심과 성원을 보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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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융복합협회는 미국과 한국에 본부를 둔 비정부 기구(NGO)로서, 국제 특히 한국 및 아시아 지역의 융복합 인재교육 발전을 위한 연구와 교육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국제융복합협회는 시민사회 싱크탱크로서 지난 2016년 설립된 이후, 한국 융복합인재 교육발전을 위해 끊임없이 연구하고 노력하며 발전해 왔습니다. 

융복합 인재개발 분야에서 지속적인 양질의 이론과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것과 융복합 인재 간의 정보교류 네트웤을 통한 한국사회 리딩 융복합 인재 육성을 최고의 목표로 하는 저희 협회는, 순수인재교육 분야를 필두로 융복합 인재 개발분야의 이론적 토대를 구축하고 있으며, 이를 한국사회에 적용하기 위하여 그 실천적 방안인 인터넷 환경을 기반으로 하는 온라인 교육 및 모바일 환경을 기반으로 한 모바일 교육과 기존 오프라인 교육업체의 과학적인 인재 교육 컨텐츠 개발에 일조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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